2005 년 편지
평화의 미래24개 아시아 말을 포함해 55개국어로 번역된 이 편지는 떼제의 로제 수사가 쓴 것으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열린 젊은이들의 유럽 모임에 즈음해 발표되었습니다. 이 편지는2005년 한 해 동안 떼제에서 매주간 개최되는 모임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리는 모임에서 묵상 재료로 쓰입니다.
“하느님은 너희를 위해 불행이 아니라 평화의 미래를 마련하신다. 하느님은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고자 하신다.” [1]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신앙이 무엇인가?’ 라고 자문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지극히 소박한 신뢰이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거듭 되찾아야 할 소중한 신뢰의 활력입니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첫 말씀 가운데 하나는 “마음이 소박한 사람은 행복하다!” [5]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함을 향해, 마음과 삶의 소박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 개인의 기도 역시 단순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많은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8] 아닙니다. 때로는 더듬거리는 몇 마디만으로도 우리의 근심과 우리의 희망 그 모두를 하느님께 맡겨드릴 수 있습니다. 복음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단순 소박함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비추어줍니다. 언젠가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도록 두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9]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그 누구도 단죄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에게 친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두려움이나 걱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사랑하실 따름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6백 년 전에 씌어졌습니다. 예레미아 29,11 및 31,17 참조 [2] 지난해 10개국이 유럽 연합의 새 회원으로 합류했습니다. 오랫동안 분열과 갈등을 겪은 유럽의 많은 청년들은 이제 일치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대륙에 자신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정한 긴장과 불의가 여전하고, 때로는 폭력 사태도 발생해서 이에 대한 회의를 자아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평화추구야 말로 유럽연합 건설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유럽 건설의 목표가 단지 더 강하고 부유한 대륙을 만드는 데에 그치고 유럽이 자신의 테두리 속으로 움츠려 드려는 유혹에 빠진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민족들과 연대하면서 다른 대륙에 개방적일 때 유럽은 본연의 모습을 온전히 찾게 됩니다. 유럽 건설은 인류 가족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한 단계 나아가는 것으로 여길 때 그 의미가 있습니다. 매년 말 우리가 개최하는 모임이 ‘유럽 모임’이라고 불리지만 우리는 그것이 ‘범세계적인 신뢰의 순례’가 되었으면 합니다. [3] 요한 복음 14,16-18 및 27절 참조. 하느님은 우리가 믿거나 의심하거나 아무 상관없이 항상 존재하십니다. 우리 안에 비록 의심이 자리한다 해도 하느님이 그만큼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4] 도스토옙스키는 언젠가 그의 비망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의심과 불신의 자식이다. 믿음에 대한 이 목마름 때문에 나는 얼마나 혹독한 고통을 겪었고 아직도 겪고 있는지! 내 안에서 거기에 반대되는 논리가 더 많이 생겨날수록 내 영혼 속에 자리한 이 갈망은 그보다 더욱 강해진다. 나의 ‘호산나’는 바로 의심의 불가마를 통과한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심오하고 더 완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이 하느님의 사람은 자신 속에 신앙과 불신이 함께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열정적인 사랑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5] 마태 5,3 [6] 비록 우리의 신뢰가 미약한 것일지라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믿음뿐만 아니라 우리를 앞서 가신 신앙인들과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신뢰에 의지합니다. [7] 유엔 세계 식량 기구(WFP)는 최근 세계의 기아 지도를 발표했습니다. 지난 수년 동안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8억 4천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그 가운데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들이 1억 8천만 명에 달합니다. [8] 마태 6,7-8참조 [9] 마태 19,14 [10] 한 주간 동안 우리 곁에 앉아서 기도하던 아홉 살 짜리 소년이 하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우리를 버리고 떠났어요. 난 아빠를 전혀 보지 못하지만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고 저녁마다 아빠를 위해서 기도해요.” [11] 1베드 3,18; 로마 1,4 및 1디모 3,16참조 [12] 이 친교와 일치의 공동체는 교회라 불립니다. 하느님의 마음 속에서 교회는 하나이며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13] 복음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우리는 서로에게 가까워집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찢어 놓았던 분열의 골이 좁혀집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체하지 말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에 담긴 그분의 말씀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5,23-24). ‘나중으로 미루어라’는 말씀이 아니라 ‘먼저 찾아가라’는 말씀입니다. [15] 시련으로 점철된 중동의 다마스커스에는 그리스 정교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이냐시오 4세가 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은 강렬한 말로 표현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이 뒷걸음치고 있다. 여러 인물들 가운데 교종 요한 23세와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 같은 분들이 체현한 초창기의 예언자적인 사건에서 과연 무엇이 남았는가? 우리의 많은 분열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몰라보게 만들고 “세상이 믿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되기를 바라신 그분의 뜻에 상반된다. 굴곡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교회 일치 운동을 건져 내기 위해서는 예언자적인 시도가 긴급히 요구된다. 우리 교회들이 서로 용서하고 회개하는 것을 도와줄 예언자와 성자들이 시급히 필요하다.” [16]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1986년 10월 5일 떼제를 방문했을 때 우리 공동체에게 일치와 친교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공동체의 비유’가 되기를 열망합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교육의 결실이자 양심의 선택인 자기 교회 소속에 충실하도록 거들고 동시에 그들이 하느님의 계획 속에 있는 교회라는 친교의 신비 안에 더욱 더 깊이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