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편지

모든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

마튜 수사
Taizé

일상생활에서 가혹한 현실에 직면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떼제 안팎에서* 들으면서, 나는 어떻 게 그들이 지속할 힘을 찾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전쟁 지역에 살고 있을 때 이 물음은 더 절실해집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그들의 인내와 회복탄력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들의 얘기를 경 청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신뢰함으로써 희망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더 분명해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자라납니 다.

부활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삶의 피로가 마지막 지점이 아니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더 많은 무엇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젊은이들이 나와 나누고 싶었던 이 희망은, 모든 것을 잃 은 듯할 때 새 생명이 솟아나기를 기대하기에 모든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입니다.*

마리아는 찬양과 희망의 외침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 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루카/누가 1:51-53) 그렇습니다. 상황이 바뀌도록 마리아와 함께 담대히 노래하고 기도합시다. 하느님/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갑자기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전쟁에 휘말리거나 강제로 조국을 떠나야 하는 사 람들과의 연대의 표시를 표현하기 위해, 비록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 묵상은 대부분 전쟁 중인 국가나 분쟁 지역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과 지난 해 만남과 대화에 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어 준 사람들과 세심한 조언으로 이 글편지가 나오 도록 해 준 공동체의 젊은 형제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희망할 용기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기를 열망할 때, 우리 주변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랑과는 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것과 앞으로 다가올 것 사이에 갇혀 있습 니다. 이 공간이 늘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취의 희망을 향해 열릴 때*우리 안의 무언가가 자유롭게 됩니다.

희망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 름입니다.”(로마서 8:25)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때에 충만히 다가올 것을 향하면서도 “안으로 는 싸우고 밖으로는 두려움에 싸여” (고린도후서 7:5 )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는, 그 공간에서 도망가지 않고 담대히 거기 머물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었습니다.”(로마서 4:18). 많은 믿음의 백성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어떤 이성적인 희망을 훨씬 넘어서는 하느님의 약속에 매달렸습니다. 그와 그 의 아내 사라는 그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받았습니다.

나라가 전쟁으로 황폐화되고 주민들이 유배의 위협을 받고 그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예언 자 예레미야는 미래에 투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 기에.그는 밭을 샀습니다 (예레미야 32:6-15).

희망으로 그렇게 놀라운 행동을 할 때 믿음은 더 분명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직 보이지 않고 불 확실하기까지 한 것에 대한 확고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궁극적으로 기 의 원천을 다시 열어줍니다*. 가장 복잡한 인류의 상황에서도, 우리가 감히 희 망조차 못했던 일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많은 국가들에서 놀라운 희망의 계획이 생겨나고 있습니 다

희망을 품은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희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잘 이해하려면 고난과 폭력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을 경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공동체의 형제 두 사람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 교회 지도자 한 분이 우리에게 이 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치유가 가능한 공간을 열어줍니다.” 그의 말은 제게 크게 와 닿았습니 다. 그는 동포의 고통을 끊임없이 목격하면서, 신자들이 열린 자세로 새로운 것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의 내면 생활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해도 다른 수단이 동반된다면 상처와 슬픔을 극복하기 시 작하고 치유된 인류의 희망을 일깨워주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가장 복잡한 상황에서도 굳건히 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낙담의 파도를 깨뜨립 니다.

프랑스에 살고 있지만 가족이 가자지구에 있는 한 팔레스타인 여성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 니다. “상처받은 이들, 연약한 이들을 안고 가는 사랑은 새로운 힘을 줍니다. 그것은 중풍병자* 를 그의 친구들이 믿음으로 들고 갔던 복음서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기도는 저항하는 방법이 기도 한데, 나는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도 인간입니다. 우리 가족 두 사람의 사 망 소식을 듣고 분노에 휩싸여 소리 지르고 울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바로 그 고통과 절 망 속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안고 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떼제를 방문했을 때 그는 “매일 아침 나는 미워하기보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기를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길을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국가의 한 젊은 여성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압도 되어 있지만 복음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얼마나 자주 피난했습니까? 하지만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더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지만 우리는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선물이며 삶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표시입니다. 기도에는 평화의 샘물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 격려 하고 나눔과 연대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레바논 청년에게서 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희망의 증인이십니다.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항상 꿋꿋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제가 오늘의 제가 되었습니다. 어머 니는 우리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고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뢰로 살아가는 사람 은 그 샘물에서 마시고 증인이 되기에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보여줍니다.”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찾아서 경청할 수 있는 희망의 증인은 누구입니까? 귀를 열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봅시다.

희망을 위한 노력

우리의 계획이 좌절되고 희망이 물거품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희망의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열쇠를 주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의 큰 무 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들에게 “마음이 나가셨습니다”*. 그 리고 그분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굴복하지 않을 때 우리 안에서 희망이 생겨납니다. 이는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과는 반대로 투쟁을 수반하며*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희망에 대한 그 갈망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과 하느님께 가능한 것 사이의 문턱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진 희망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미래에 충만하게 다가올 일을 미리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배의 닻과 같아서*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우리를 굳건히 붙들어 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에 대한 신실함의 작은 표지들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비처럼 쏟아질 수 있는 역경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투 구와도 같습니다.*

떼제의 규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쉽게 고백하면서도 갈라진 채로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의 스캔들”에 결코 굴복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로제 수사에게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단순 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류 가족의 평화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떼제 주변의 소박한 회 양목은 지난 몇 년간 기생충 때문에 두 번이나 큰 피해를 입었지만 갑자기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 다. 명백히 죽은 나무에서 회색이 녹색으로 변하면서 파릇파릇한 가지가 자랍니다. 자연은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 희망을 향한 우리 자신의 싸움을 반영하고 격려합니다. 피조물을 위한 희망과하느님의 선한 창조가 주신 희망은 인류를 위한 희망과 함께 갑니다.*

희망의 사람으로 남기

상호 이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하면 희망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남을 의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면 다른 사람들을 불신의 그물에 빠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사회와 국가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 사회, 교회, 가족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은 숨겨지거나 공개될 수 있지만 항상 우리의 힘을 소모시킵니다. 그러나 불의 앞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악을 단죄해야 할 때 가 있습니다.*

희망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일 때 희 망은 피어납니다. 우리는 가장 큰 역경 속에서도 살고, 웃고, 매일 가능한 작은 것들을 내어주기 로 선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희망은 진실*과 정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 다 하느님의 품성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우리 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그것들을 보지 않습니까? 희망을 키우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 로 직시하고 이를 하느님의 약속에 비추어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쟁 지역에 사는 한 젊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로켓이 우리 주위로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해서 뛰쳐나갔지만 나는 남아서 책을 끝까 지 읽기로 결정했습니다.” 피난처를 찾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었겠지만, 이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 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에 대한 희망의 항의입니다.

내 형제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도발적이며, 그 이상으로 전염성이 있습니다. 희망의 반대는 무관심이나 체념입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를 최근 방문했 을 때 슬픔과 걱정과 불안에 찬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 을까?'라고 자문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운전할 때 내게 통행 우선권이 있을 때마다 멈춰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먼저 가도록 해 주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는 5초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이 작은 행동에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고, 내 형제나 자매의 고통이 조금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은 전쟁과 죽음에 저항합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은 생명과 아름다움을 갈망 합니다.”*

부활절 희망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디에 있나요? 성금요일 십자가 아래에? 부활 주일의 기쁨 속에? 아니면 성 토요일에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가 어디에 있든 희망의 길을 엿볼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 치시고, 폭력과 증오와 죽음의 모든 세력보다 더 강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그 길은 내 앞에 열립니다.

희망은 상황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자주 깜빡이는 신뢰의 불꽃에 힘입습니다. 이 불꽃은 비록 연 약하지만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장 깊은 밤에 타오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 은 그분이 가장 큰 시련을 겪었을 때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분의 임재는 우리의 인식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절망 때문에 볼 수 없었듯이 우리도 절망하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 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고 있느냐?” (요한복음 20:15)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은 요한복음에서 그분이 하신 첫 번째 말씀 인 “무엇을 찾고 있느냐?”와 같습니다.(요한복음 1:38). 그가 인간의 가장 깊은 슬픔과 죽음을 받 아들이신 이후로, 의미를 찾는 것은 현존에 대한 갈망이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부활 하신  수님께서는 슬픔이 가득하든 기쁨이 가득하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만나 시어, 우리에게 아버지와의 관계와 성령 안에서 서로의 친교를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절 망의 포로가 아닙니다. 새로운 삶이 가능합니다.

바울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5). 그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성령 께서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순례자

부활에 대한 믿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 리 자신의 불가능함을 뛰어넘어 우리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원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면 많은 용기와 대담함이 필요합니다. 그 말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존재 하는 죽음과 파괴 때문에 꼼짝 못하고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실 수 있으며, 심지어 갈등에서 화해를 가져오실 수도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온 그분의 벗인 여자들은 “누가 돌을 굴려내 줄 것인가?” 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마르코/마가 복음 16:3) 우리 가운데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느님 께 굴려내 달라고 간구해야 할 돌들은 무엇일까요?

그 새로운 생명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품은 희망의 순례자가 됩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에 대한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소/에베소 2:14)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 씀하시는 것을 듣게 될까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 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복음14:27-28).

평화의 순례자로서* 우리는 정의 없이는 참된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우리 안 에 간직한 평화는 우리가 터하여 살아가는 희망에서 나오고 우리를 내적으로 자유롭게 해줍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로 인내롭게 살아갈 때 생명을 사랑하고 불의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즈카리야/스가랴의 노래로 기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타국에 점령된 땅의 노인이 었던 그는 예상치 못한 탄생을 기뻐하며 경축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의 덕 분이라.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 을 비추어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리라.”(루카/누가 1:78-79).

우리는 모든 희망 그 이상의 희망을 품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여, 성령의 현존으로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고 우리가 모든 희망을 넘어 희망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놀라운 평화가 차츰 솟아납니다. 주님은 찬양받으소서!

Annual messages

Published on 2025.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