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ZÉ

2025년 편지

모든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

 

일상생활에서 가혹한 현실에 직면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떼제 안팎에서 들으면서[1] , 나는 어떻게 그들이 지속할 힘을 찾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전쟁 지역에 살고 있을 때 이 물음은 더 절실해집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그들의 인내와 회복탄력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들의 얘기를 경청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신뢰함으로써 희망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자라납니다.

부활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삶의 피로가 마지막 지점이 아니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더 많은 무엇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젊은이들이 나와 나누고 싶었던 이 희망은, 모든 것을 잃은 듯할 때 새 생명이 솟아나기를 기대하기에 모든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입니다[2].

마리아는 찬양과 희망의 외침으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루카/누가 1:51-53) 그렇습니다. 상황이 바뀌도록 마리아와 함께 담대히 노래하고 기도합시다. 하느님/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갑자기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3].

동시에, 우리 주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전쟁에 휘말리거나 강제로 조국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의 표시를 표현하기 위해, 비록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모든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 묵상은 대부분 전쟁 중인 국가나 분쟁 지역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과 지난 해 만남과 대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어 준 사람들과 세심한 조언으로 이 글편지가 나오도록 해 준 공동체의 젊은 형제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희망할 용기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기를 열망할 때, 우리 주변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랑과는 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것과 앞으로 다가올 것 사이에 갇혀 있습니다. 이 공간이 늘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취의 희망을 향해 열릴 때[4], 우리 안의 무언가가 자유롭게 됩니다.

희망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서 8:25)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때에 충만히 다가올 것을 향하면서도 “안으로는 싸우고 밖으로는 두려움에 싸여” (고린도후서 7:5 )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는, 그 공간에서 도망가지 않고 담대히 거기 머물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었습니다.”(로마서 4:18). 많은 믿음의 백성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어떤 이성적인 희망을 훨씬 넘어서는 하느님의 약속에 매달렸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사라는 그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받았습니다.

나라가 전쟁으로 황폐화되고 주민들이 유배의 위협을 받고 그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예언자 예레미야는 미래에 투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에.그는 밭을 샀습니다 (예레미야 32:6-15).

희망으로 그렇게 놀라운 행동을 할 때 믿음은 더 분명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직 보이지 않고 불확실하기까지 한 것에 대한 확고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궁극적으로 기쁨의 원천을 다시 열어줍니다[5].가장 복잡한 인류의 상황에서도, 우리가 감히 희망조차 못했던 일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많은 국가들에서 놀라운 희망의 계획[6] 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희망을 품은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희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잘 이해하려면 고난과 폭력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내가 공동체의 형제 두 사람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 교회 지도자 한 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치유가 가능한 공간을 열어줍니다.” 그의 말은 제게 크게 와 닿았습니다. 그는 동포의 고통을 끊임없이 목격하면서, 신자들이 열린 자세로 새로운 것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의 내면 생활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해도 다른 수단이 동반된다면 상처와 슬픔을 극복하기 시작하고 치유된 인류의 희망을 일깨워주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가장 복잡한 상황에서도 굳건히 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7].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낙담의 파도를 깨뜨립니다.

프랑스에 살고 있지만 가족이 가자지구에 있는 한 팔레스타인 여성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상처받은 이들, 연약한 이들을 안고 가는 사랑은 새로운 힘을 줍니다. 그것은 중풍병자[8]를 그의 친구들이 믿음으로 들고 갔던 복음서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기도는 저항하는 방법이기도 한데, 나는 그 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도 인간입니다. 우리 가족 두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에 휩싸여 소리 지르고 울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바로 그 고통과 절망 속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안고 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여름 떼제를 방문했을 때 그는 “매일 아침 나는 미워하기보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기를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은 길을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국가의 한 젊은 여성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압도되어 있지만 복음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얼마나 자주 피난했습니까? 하지만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공동체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더 위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지만 우리는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선물이며 삶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표시입니다. 기도에는 평화의 샘물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나눔과 연대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레바논 청년에게서 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희망의 증인이십니다.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항상 꿋꿋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제가 오늘의 제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고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뢰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샘물에서 마시고 증인이 되기에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보여줍니다.”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찾아서 경청할 수 있는 희망의 증인은 누구입니까? 귀를 열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봅시다.

희망을 위한 노력

우리의 계획이 좌절되고 희망이 물거품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희망의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열쇠를 주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의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들에게 “마음이 나가셨습니다” [9] 그리고 그분은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굴복하지 않을 때 우리 안에서 희망이 생겨납니다. 이는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과는 반대로 투쟁을 수반하며[10],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희망에 대한 그 갈망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과 하느님께 가능한 것 사이의 문턱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주어진 희망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미래에 충만하게 다가올 일을 미리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배의 닻과 같아서.[11]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우리를 굳건히 붙들어 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과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에 대한 신실함의 작은 표지들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비처럼 쏟아질 수 있는 역경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투구와도 같습니다.[12]

떼제의 규칙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쉽게 고백하면서도 갈라진 채로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의 스캔들”에 결코 굴복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로제 수사에게 그리스도인의 일치는[13] 단순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류 가족의 평화를 향한 길이었습니다. [14]

떼제 주변의 소박한 회양목은 지난 몇 년간 기생충 때문에 두 번이나 큰 피해를 입었지만 갑자기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명백히 죽은 나무에서 회색이 녹색으로 변하면서 파릇파릇한 가지가 자랍니다. 자연은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 희망을 향한 우리 자신의 싸움을 반영하고 격려합니다. 피조물을 위한 희망과[15],하느님의 선한 창조가 주는 희망은 인류를 위한 희망과 떼놓을 수 없습니다.[16]

희망의 사람으로 남기

상호 이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하면 희망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남을 의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면 다른 사람들을 불신의 그물에 빠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사회와 국가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 사회, 교회, 가족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은 숨겨지거나 공개될 수 있지만 항상 우리의 힘을 소모시킵니다. 그러나 불의 앞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악을 단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17]

희망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일 때 희망은 피어납니다. 우리는 가장 큰 역경 속에서도 살고, 웃고, 매일 가능한 작은 것들을 내어주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희망은 진실[18] 정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 다 하느님의 품성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그것들을 보지 않습니까? 희망을 키우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이를 하느님의 약속에 비추어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19].

분쟁 지역에 사는 한 젊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로켓이 우리 주위로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해서 뛰쳐나갔지만 나는 남아서 책을 끝까지 읽기로 결정했습니다.” 피난처를 찾는 것도 현명한 선택이었겠지만, 이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에 대한 희망의 항의입니다.

우리 형제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도발적이며, 그 이상으로 전염성이 있습니다. 희망의 반대는 무관심이나 체념입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를 최근 방문했을 때 슬픔과 걱정과 불안에 찬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운전할 때 내게 통행 우선권이 있을 때마다 멈춰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먼저 가도록 해 주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는데는 5초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하지만 이 작은 행동에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고, 내 형제나 자매의 고통이 조금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은 전쟁과 죽음에 저항합니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은 생명과 아름다움을 갈망합니다.”[20]

부활절 희망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디에 있나요? 성금요일 십자가 아래에? 부활 주일의 기쁨 속에? 아니면 성토요일에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가 어디에 있든 희망의 길을 엿볼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고, 폭력과 증오와 죽음의 모든 세력보다 더 강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 길은 내 앞에 열립니다.

희망은 상황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자주 깜빡이는 신뢰의 불꽃에 힘입습니다. 이 불꽃은 비록 연약하지만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가장 깊은 밤에 타오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분이 가장 큰 시련을 겪었을 때 그분을 버렸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그들은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그러나 그분의 임재는 우리의 인식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절망 때문에 볼 수 없었듯이 우리도 절망하면 앞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 그리고 “누구를 찾고 있느냐?” (요한복음 20:15)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은 요한복음에서 그분이 하신 첫 번째 말씀인 “무엇을 찾고 있느냐?”와 같습니다.(요한복음 1:38). 그가 인간의 가장 깊은 슬픔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이후로, 의미를 찾는 것은 현존에 대한 갈망이 되었습니다.[21].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2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슬픔이 가득하든 기쁨이 가득하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만나시어, 우리에게 아버지와의 관계와 성령 안에서 서로의 친교를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의 포로가 아닙니다. 새로운 삶이 가능합니다.

바울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5). 그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성령께서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순례자

부활에 대한 믿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불가능함을 뛰어넘어 우리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원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면 많은 용기와 대담함이 필요합니다. 그 말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죽음과 파괴 때문에 꼼짝 못하고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실 수 있으며, 심지어 갈등에서 화해를 가져오실 수도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온 그분의 벗인 여자들은 “누가 돌을 굴려내 줄 것인가?”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마르코/마가 복음 16:3) 우리 가운데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굴려내 달라고 간구해야 할 돌들은 무엇일까요?

그 새로운 생명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품은 희망의 순례자가 됩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에 대한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소/에베소 2:14)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될까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23]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복음 14:27-28).

평화의 순례자로서[24], 우리는 정의 없이는 참된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25] 우리가 우리 안에 간직한 평화는 우리가 터하여 살아가는 희망에서 나오고 우리를 내적으로 자유롭게 해줍니다. 우리가 성령의 감화로 인내롭게 살아갈 때 생명을 사랑하고 불의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는 즈카리야/스가랴의 노래로 기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타국에 점령된 땅의 노인이었던 그는 예상치 못한 탄생을 기뻐하며 경축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하느님의 지극한 자비의 덕분이라. 하늘 높은 곳에 구원의 태양을 뜨게 하시어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리라.”(루카/누가 1:78-79).

우리는 모든 희망을 넘어서 희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여, 성령의 현존으로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고 우리가 모든 희망을 넘어 희망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놀라운 평화가 차츰 솟아납니다. 주님은 찬양받으소서!

[1]  2024년 5월, 나는 우리공동체 수사 두 사람과 함께 전쟁으로 찢어진 우크라이나에 순례자로 찾아갔습니다. 여름 동안 우리는 미얀마, 니카라과,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을 떼제에 맞이했습니다. 가을에는 네 명의 수사들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왔고 나는 위에 언급한 세 나라와 베들레헴과 레바논의 청년들과 온라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2] “너무나 캄캄해서 대낮에도 밤과 같고 개인과 민족들이 환상을 버리게 할만큼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먼저 경험하지 않고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Corine Pelluchon, L’espérance, ou la traversée de l’impossible의 (Éditions Payot & Rivages, 파리, 2023) p. 8

[3]  “희망은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Anne Lécu가 인용한 Jacques Ellul의 말.
www.revue-etudes.com/article/esperer/24779

[4]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는 신명기 4장 31절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느님은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충실함은 무엇보다도 기억이다. 신실하다는 것은 우리의 약속과 결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전통을 간직한다는 말이다. 언약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언약의 근원과 그것이 요구하는 바를 먼저 기억해야 한다. (...) 그러나 참된 신실함은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미래에 대한 투사를 요구하는데, 이는 언뜻 보기에는 덜 명확해 보이지다. 기억을 갖는다는 것은 과거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제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내일에 베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니다(...). 충실함은 주도권 없이 이미 다져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항구히 새롭게하는 데 있다. 그것은 우리가 혁신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계획을 설계하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Gustavo Gutiérrez, El Dios de la vida, Ediciones Sígueme, Salamanca, 1992, pp. 82-83).

[5] 전쟁 상황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과의 대화에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힘의 원천으로 노래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했습니다. 이 편지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열리는 2024-2025년 젊은이들의 유럽 모임에서 발표되었습니다. 1991년 에스토니아가 평화적으로 독립을 되찾는 데 큰 공헌을 한 ’노래하는 혁명’을 잊지 맙시다. 당시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위협에 맞서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가두 시위에 나갔습니다.

[6]  우리 형제 중 한 사람이 순례 중에 만난 어떤 사람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는 창조적인 분노가 살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바꾸기 위해 그가 작은 일 하나라도 해보고 싶게 만는 것은 바로 그 힘이었습니다.

[7] “스승 (실루안)으로부터 그(소프로니 사카로프)는 자신의 영적인 삶에 바탕이 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두 가지가 눈에 띈다. 기도 중에 경험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황량한 공허함일 때 버림받은 느낌에 어떻게 직면해야 하는지, 그리고 고통 받는 세상을 위한 강렬한 기도에 수반되는 불안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다. 첫 번째는 사하로프가 나중에 더 많이 발전시킬 ’하느님께 버림받음’의 개념으로 의미를 찾았고, 두 번째는 기도 중에 스승에게 계시되었고 그가 제자에게 전달한 명령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네 마음은 지옥에 두고 절망하지 말라! ’” Norman Russell, Theosis and Religion (캠브리지 대학 출판부 2024), p. 169

[8] 마르코/마가복음 2:1-12 참조. 친구를 도우려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 모든 장벽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가진 희망의 힘을 주목하십시오..

[9] 그리스어 동사 σπλαγχνζομαι(스플란크니조마이)는 매우 강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이는 필요에 대한 따뜻하고 자비로운 반응을 나타냅니다.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자비, 연민, 동정 모두가 그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그들에게로 향했다”는 것은 아마도 동사가 암시하는 직감적인 반응을 더 완전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에서(14:14, 15:32, 18:27, 20:34 참조) 동사는 단지 감정이나 느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맞는 실제적인 반응도 지칭합니다. 이 경우, 예수께서는 병자를 고치신 다음 군중을 먹이실 것입니다. 감정은 배려와 효과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동사는 간단히 말해서 복음을 담고 있습니다.

[10]  디모데오 전서 4장 10절 “우리가 수고하며 싸우는 것은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사람들의 구세주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11]  히브리서6장 19절 참조

[12]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 참조

[13]  공동합의성(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시노드는 가톨릭 교회가 이미 그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인식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번 시노드에서 다른 교회 대표들의 역할은 중요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일치를 향한 길에서 일치 운동 소명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주지 않습니까?

[14]  떼제는 전쟁 중에 설립되었습니다. 우리가 다양한 교회, 국가, 문화, 시대의 형제로서 살려고 노력하는 “친교의 비유”가 인류 가족의 분열에 직면한 희망의 표징이 되려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합니다.

[15]  로마서 8장 21-23절 참조

[16] 기후 변화의 도전과 생물 다양성의 감소 앞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우리 공동의 집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심화시킬 수 있을까요?

[17]  우리 떼제 공동체는 일부 형제들이 받은 학대와 추행 혐의에 대하여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겪고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우리는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나 자주 그들은 거듭거듭 새로운 희망과 삶을 찾습니다. 그에 힘입어 우리는 떼제와 다른 곳에서 열리는 모임이 모든에게 안전한 것으로 만들고 관련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www.taize.fr/protection 참조). 또한 생존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중재하는 인정 및 배상 위원회(www.reconnaissancereparation.org/참조)의 활동에도 감사드립니다.

[18] “나는 희망이 진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정치적으로, 생태학적으로, 인도적으로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 경악하는 것은 정상이지만 희망을 가질 때 우리는 바로 그 곳, 이러한 현실 한복판에 서서 진실되이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희망을 영웅적인 덕성으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행동하며, 우리가 알고 있거나 좋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는 덕성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하느님의 약속으로 인도합니다.” Clémence Pasquier, 인터뷰: Clémence Houdaille, La Croix, 2024년 11월 10일

[19] 키쿠유(기쿠유) 언어에서 하느님의 속성 중 하나는 하느님이 “희망할만한” “Mwihokeku” 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Mwĩhoko – 희망; Wĩhokeku – 희망 가치; Mwĩhokeku – 희망할만한 가치가 있는. 예. Ngai nĩ mwĩhokeku | 하느님은 희망을 품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20]  “희망이 현재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원한을 버리고 현재에 살고 미래를 믿도록 가르칩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 영혼이 갈망하는 것이며, 그것이 없을 때 우리는 비참해지고 폭력적으로 됩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처럼 희망은 욕망이 버린 몸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L’espérance, ou la traversée de l’impossible의 Corine Pelluchon(Éditions Payot & Rivages, 파리, 2023) pp. 13-14

[21] “우리처럼 고통받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변한 바로 십자가 위의 그분이 우리의 비극적인 인간 존재를 조명해 주신다. … 우리는 예수를 단순히 흉내낼 모범으로만 보지도 않고 그를 우상화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받고 우시는 하느님으로 본다.” 홍콩 출신 신학자 Kwok Pui Lan의 글 “God Weeps with Our Pain” John S. Pobee 및 Barbel von Wartenberg-Potter이 편집한 책 New Eyes for Reading: Biblical and Theological Reflections by Women from the Third World (Meyer Stone Books, Bloomington, IN, 1987), p. 92

[22] 요한복음 12:32 참조

[23]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요한복음 14:27). 온전히 성숙한 이의 특징은, 두려움으로 안절부절하거나 의심에 동요하고 공포에 흔들리고, 슬픔에 휩싸이면서 세상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밀려드는 세상사의 홍수와 폭풍 앞에서도 마치 견고하고 안전한 곳처럼 평온한 믿음의 속에 굳건히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주신 것은 바로 이런 변함없는 자세입니다. 주님은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내적 평화를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십니다.” Ambrose of Milan, Treatise III, On Jacob and the Blessed Life 6, 28, Soyons l’âme du monde(Les Presses de Taizé, 1998 및 2025) p.에서 인용됨. 109

[24www.taize.fr/pilgrims-of-peace참조

[25] 시편 85:10을 참조.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마지막 업데이트: 2025년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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