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찾습니까?
Brother Matthew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화면을 가득 채우는 쉬운 약속들보다 더 큰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진정한 목적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도록 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앙의 신뢰로 살아가려 할 때 우리는 때로 이렇게 자문합니다. 하느님/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너무 많은데 내가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인가?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는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 레바논, 니카라과, 미얀마 등 전쟁과 갈등이 만연한 곳에서 온 젊은이들을 맞았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에 대한 갈망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 가자지구에서 일하거나 그곳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의 증언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인질로 잡힌 이들의 고통을 보고, 억압적인 정권 아래 정의를 요구하는 이들의 절규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브라질과 쿠바에서 작은 공동체로 살고 있는 우리 떼제의 형제들과도 잠깐 함께 지냈습니다. 브라질은 여전히 노예제의 잔재와 극심한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살바도르 시의 한 공동체가 생각납니다. 그곳에서는 노숙자들이 교회에서 잠을 자며 서로 돕고 있습니다.
쿠바에서 저는 엄청난 어려움 속에 살아가는 용감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손자가 새 학년을 시작하면서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도록 가진 돈 모두를 내어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다른 많은 쿠바인들처럼 손자의 엄마도 더 나은 미래를 찾아 외국으로 떠나고 없었습니다.
많은 곳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내게 주어진 자유를 이용하여 고통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합니다. 그들은 사랑하고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현실이 되어, 남을 돕고 봉사함으로써 삶을 의미있게 만들 길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지만, 불의 또한 너무나 많습니다. 그 모든 것 속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일까요? 나는 무엇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나요? 복잡한 삶과 수많은 선택들 앞에서 제 마음 속에는 자주 이런 질문이 솟아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말씀은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입니다. 저는 떼제에서 4대륙 6개국에서 온 여섯 명의 청년 자원봉사자들과 이 질문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다음은 그들이 제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에게, 또 기도하고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해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 공동체와 함께 지내면서 떼제의 모임 운영을 돕는 모든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Brother Matthew
침묵을 찾아서
떼제에서 일주일을 보낸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으면 많은 사람이 침묵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엄청나게 긴밀히 연결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이곳은 놀랍게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끝없이 밀려오는 정보를 단절할 때, 때로는 침묵 속에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만나고 더 큰 실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 안에서 바람 소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새들의 노래가 우리를 에워쌀 때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교감을 느끼는 내적인 침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별이 총총한 밤은 우리를 경이로움으로 가득 채웁니다.*
예수께서는 침묵 가운데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셨던 분이 밤의 침묵 속에서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태어나 우리와 함께 계셨우니:* 그분은 어둠 속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침묵은 공허하지 않고 만남의 장소가 됩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너무나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기에 우리는 침묵과 씨름합니다. 떼제의 규칙서에 나와 있듯이, "분심이 들고 주의가 산만해지면, 그것에 대해 자기를 탓하지 말고 그 즉시 기도로 돌아가십시오."*
여러 세기 전,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말합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라!’ 하느님, 당신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우리 마음의 침묵 속에서 거듭 다시 하느님을 찾겠습니까?
기도는 흔히 무엇보다도 갈망이며,*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조용히 평화를 희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한숨으로 기도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귀 기울일 때, 바로 그곳에 성령께서 거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과, 그리고 내 안에서 숨 쉬시는 하느님과 마주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 제 마음의 침묵 속에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 속에서, 당신 말씀을 들으며, 당신의 겸손한 현존을 맞이하면서 당신을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매일 침묵하며 하느님의 임재/현존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갖겠다고 다짐해 볼까요? 어쩌면 단 5분으로 시작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짧은 성경 구절을 읽거나, 지난 하루 동안 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세요. 아니면 그냥 시간을 내서 가만 있는 것도 괜찮습니다.
방향을 찾아
침묵은 진정한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할 때, 침묵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책임 있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그런 자유는 두려움 없이 우리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두려움은 결코 좋은 조언자가 될 수 없으며, 하느님은 결코 우리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감과 어떤 형태의 안정감을 동시에 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삶의 방식을 찾는 과정에서 때로는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혼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두 젊은이가 자신들이 신뢰하는 스승 세례자 요한과 함께 요르단 계곡에 머물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자신 곁에 묶어두려하지 않고 다른 분, 곧 예수님을 향하도록 가리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선생님, 어디 사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와서 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질문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의 방향을 찾고 발견하는 과정을 요약합니다. 우리 자신의 갈망, 더 큰 삶에 대한 열망에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 - 시작하지만 계속 더 나아가 그 열망으로 예수님의 인격을 마주하게 됩니다. -"선생님, 어디에 사십니까?"
"와서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며, 무조건적이고 안전하며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주저함과 심지어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초대에 담대히 응답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님, 저에게 길을 보여 주시고 그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십시오.*
나를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인도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잠시 시간을 내어 그들에게 감사를 표해 보세요.
기쁨을 찾아
떼제의 자원봉사자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이 모든 것을 제공하는 세상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깊은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 우울증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기쁨의 약속들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상당수는 지속적인 기쁨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지 한 순간의 즐거움만 줄 뿐입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기쁨은 깊은 곳에서 솟아오릅니다. 기쁨은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기쁨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억지로 기쁨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고, 경쾌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친구들과 함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무언가 부족했던 바로 그 순간에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가난을 만나시고, 그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의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기쁨이며, 그분은 그 기쁨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셨습니다.*
오래전 콜카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벽에는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이 걸려 있었는데, 하느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시고 완벽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내면의 가난 때문에 자신이 충분히 훌륭하지 못하다고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빈손으로 설 수 있다면, 그분께서 오셔서 채워주시고 그 가난을 조금씩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기쁨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슬픔의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는 아무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당신의 기쁨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결코 끝나지 않는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누군가를 단순히 온라인이 아니라 직접 만나 보세요.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겸손한 봉사를 통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보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내가 섬기는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한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의미를 찾아서
우리 각자 안에는 의미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이 갈증을 어디에서 해소할 수 있을까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우리 내면 어딘가에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속삭이는 조용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참된 의미를 찾고 있던 니고데모라는 지도자가 예수님에 관해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방법을 찾으려고 밤중에 찾아 왔습니다.
신앙, 삶과 죽음, 의미와 목적에 대한 우리의 가장 심오한 질문은 종종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경우처럼 그것들이 표현되기 전까지는, 우리 안의 무언가는 충족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찾는 동안, 생명의 근원에 이를 때까지 우리의 질문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질문에 대한 모든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담대히 결심할 때, 우리는 분명한 신뢰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맡겨야 할 지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감싸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의미는 인류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더 큰 사랑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비밀입니다.
니고데모는 한걸음씩 빛으로 나아갔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만난 지 일 이 년쯤 지나서, 그는 예루살렘의 권력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분을 변호했습니다.* 몇 달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는 큰 용기를 보였습니다.* 그는 담대히 예수님의 친구들 무리에 들기로 했습니다. 그는 용기가 있었기에 공동체로 들어갔습니다.
인도하소서, 다정한 빛이여, 날 에워싼 어둠 속에서 나를 인도하소서… 저 멀리 있는 광경을 보여 달라고 청하지 않으렵니다. 한 걸음이면 내게 충분합니다.*
각자가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는지 이야기하는 모임을 열어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신앙에서, 다른 사람들은 구체적인 어떤 행동을 통해 찾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해답보다 질문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고 경청하는 것은 서로를 격려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적절하다고 생각된다면, 성령을 부르는 노래로 모임을 시작하고 감사의 노래로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찾아
불의는 생태계 파괴,* 불평등, 폭력, 억압, 전쟁 등 어떤 형태이든 분노, 슬픔, 때로는 절망까지 온갖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불의에 맞서 싸우기로 옳바른 결심을 할 때, 우리 자신의 의견에 너무 갇혀서 더 이상 그 너머를 보지 못할 위험이 있지는 않은가요?* 심지어 우리 자신의 알고리즘의 포로가 되어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양극화에 사로잡힐 위험도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 비록 의견 일치가 불가능하더라도 우리와 다른 관점들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도록 허용합시다.
때로는 해결책이 불가능해 보이는 복잡한 현실을 함께 견뎌낼 준비가 필요합니다.* 다양한 쪽에서 나온 이야기를 듣는 것은 엄청 힘들 수 있지만, 듣지 않는 것은 부당할 것입니다.
떼제의 교회에서 저녁 기도를 마친 후, 한 젊은 여성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안에 존재하는 폭력성을 인식해야 하지만, 관상에 대한 필요와 함께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저는 이 말에 큰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그 감정을 억누르거나 붙잡아 존재하지 않는 척하는 대신, 하느님에 대한 갈망과 함께 그 감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 있는 파괴적인 힘이 우리를 사로잡을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심지어 온 나라를 악마화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 그것을 지속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관상, 즉 기도는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열어주어 우리 내면에 있는 것과 화해하고, 다리를 놓는 방법을 찾도록 이끌어 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용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함께 계십니다. 떼제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로제 수사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창조적인 폭력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복음의 길을 떠나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하느님 나라라고 부르는 정의롭고 올바른 관계의 세계를 구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은 분노하셔서 성전에서 장사꾼과 환전꾼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위선을 격렬하게 비판하셨지만, 니고데모와 같은 종교 지도자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바리사이인들과 친분이 있으셨고 그들의 환대를 받아들이셨으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도 식사를 함께 나누셨습니다.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품으셨지만,* 로마 장교의 믿음에 감탄하여 그의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또한 나라밖으로 여행하시다 만난 이교도 여인의 믿음에 탄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위험을 감수하시면서* 신뢰를 키우시고 하느님의 화해의 능력을 구현하셨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인간의 단순한 선행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롭게 되어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당신은 불의를 고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셨지만, 당신의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다리를 놓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사람과 나라를 갈라놓는 분열을 메우려는 우리의 갈망을 키워주시고, 이 땅에 정의가 꽃피게 하소서.
분열이 있는 곳에 다리를 놓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인 어떤 실천을 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혼자 행동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찰하고, 생각을 모으고,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세요. 우리에게 고유한 복음적 가치에 충실하면서도 우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공동체를 찾아서
떼제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가치관과 복음의 가치관에 따라 살고 싶습니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저는 이것이 과연 다른 사람들과 지구에 그리고 나에게도 용납될 수 있는 일일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과, 창조세계와,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동체 - 팬데믹으로 인한 고립 이후, 우리는 공동체의 세계,* 배려하는 세계* 를 재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공동의 집,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창조세계 안에서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공동체는 붕괴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대부분의 친구들은 도망쳤습니다. 모든 사람을 환대하고 사랑하는 친교의 삶을 이루려던 예수님의 모든 노력은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할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계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두운 순간에 공동체는 십자가 아래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네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가능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만들어 주시는 그 친교의 증인이 됩니다.
적대감과 거부는 인간의 친교를 깨뜨립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적대감과 거부감을 스스로 짊어지시고, 가장 큰 고통의 순간에도 친교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를 어머니에게 또 다른 아들처럼 내어주셨고,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미래의 제자들을 대표하여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새로운 가족, 곧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탄생합니다. 이 교회는 인간적인 승리가 아니라, 말못할 고통의 침묵보다 더 큰 사랑에서 탄생합니다. 이 친교에서 누가 제외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서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들, 불의의 희생자들과 함께 서도록 부름 받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사람 한사람의 자유와 존엄이 존중되도록 공정하고 올바르게 서로를 환대하라는 부름을 받은 인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 곧 일곱째 날에 하죽으심으로써 당신의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심히 좋았더라”고 보시고 일곱째 날에 창조 사역을 마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통해 베푸신 선물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지만,* 그분의 몸에서 “생수의 강”* 이 흘러나왔습니다. 이 물은 다름 아닌 성령께서 땅의 표면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몸은 정원에 있는 새로운 무덤에 안치됩니다. 이 정원은 우리 땅이 되어야 할 정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의 침묵 속에서, 우리가 속해 있고 우리의 보살핌에 맡겨진 상처 입은 창조물은 비밀스러운 변형을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고, 우리에게 얼마나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실지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와 함께 십자가 아래 서서 당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우리는 누구와 함께 서도록 요청받는가?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를 경험하는가? 학생들은 특히 해외 유학생들과 함께 집을 공유하고, 기도하고, 식사를 나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매주 누군가의 집에서 모임을 갖는다.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불의에 대한 감정을 간단한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하라.
평화를 찾아서
우리는 평화를, 내면의 평화와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 세상의 평화를 갈망합니다. 4세기의 한 신자는 "자신 안에서 평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십시오. 당신이 먼저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절 아침, 예수님은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셨을 때,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자신이 그리워하던 분이 죽음에 굴복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닫자 마리아의 눈물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보고 들은 것을 다른 벗들에게 전하도록 그를 보내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 여전히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그들을 만나셨을 때, 그분의 첫 말씀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두려움 안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당신 현존/임재의 평화로 열어주십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시며, 그분은 당신의 화해 사역을 계속할 책임을 그들에게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에게 약속하신 평화, 곧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성경에서 '샬롬'이라는 단어는 회복과 온전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꾸고 발전시키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평화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평화를 발견하도록 도울 때, 적대감의 장벽이나 그들을 가두는 벽을 허물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창조세계를 경이로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보살핌을 보일 때, 우리도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약속하신 평화에 깊이 스며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함께 길을 떠나 서로 동행하며 한 걸음씩 희망을 뿌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내주신 곳에서 우리는 가장 단순한 행동을 통해서라도 각자의 방식으로 화해의 표징, 평화의 순례자가 되고자 노력할 것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치명적 갈등이나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전쟁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억압적인 정권이 있는 나라나 전쟁을 조장하는 정부 아래에서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지원하십시오. 이들 중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줄 수 있을까요?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마련하고 그들의 간증을 나누십시오.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랑의 하느님, 우리를 축복하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우리의 발걸음을 성령을 통해 항상 인도하소서. 우리가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순례자가 되도록 힘쓰게 하소서.
Opublikowane 2025. 12. 27.